살기위해 바라본다. |
몇 달 전 내게 감당 할 수 없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일은 내 삶에 관한 이야기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시냅스가 군데군데 끊어진 뉴런이 만들어낸 감각들처럼 삶은 횡설수설하기만 합니다. 삶이 우울로 사그라들수록 세상을 바라보는 내 자신도 무의미와 혼돈으로 빠져들어갑니다. 몇 년간 잊고 지내던 카메라를 다시 꺼내 든 것은 금년 초 입니다.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사는 지, 무엇을 바라보고 사는지 알아야만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내게는 '사진을 찍는 다는 것'이 사람들이 생각하듯 추억을 남기기 위한 작업도 아니고, 피사체를 이미지 안에 고정시키는 작업도 아닙니다. 사진은 내게 '무엇을 보는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본다'라는 문제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본다'라는 것을 카메라가 상(像)을 만들어내는 작업에 많이 비유 합니다. 피사체로부터 반사된 빛이 수정체라는 랜즈를 통해 들어오면, 수정체는 피사체에 촛점을 맞추게 되고, 홍채는 조리개처럼 빛의 양을 조절합니다. 빛은 그렇게 조절되어 시각 피질 안에 자라잡게되고 시각 피질 안의 시세포 다발이 빛 자극을 뉴런을 통해 뇌로 전달하게 되는 작업을 '본다'라는 것의 개념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프로세스는 노벨상을 받은 허블과 비셀(David Hunter Hubel, Torsten Nils Wiesel)의 공동연구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문제는 수용된 자극을 뇌로 보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뇌는 과연 이렇게 전달되어 온 자극들을 어떠한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일까요? 시세포가 자극을 뉴런으로 전달하는 데 까지의 프로세스는 '본다'라는 작업의 반 정도이고 실제적으로 '본다라는 작업이 완성되려면 자극을 뇌가 해석하는 방식을 알아내야 합니다. 이 프로세스에 대해서는 허블과 비셀의 연구처럼 잘 알려져있지는 않습니다. 연구자들에 따라 논의가 분분한데 요즘 많이 유행하는 핑커(Steven Pinker) 스타일의 마음이론은 뇌의 해석을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생각합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를 프로그래밍해나가고, 오류를 수정하며 사물에 대한 해석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본성과 양육에 관한 논쟁으로 유명해진 리들리(Matt Ridley)는 유전과 발생을 통해 어느정도 만들어지고, 나머지는 발달시켜간다는 애매한 입장을 취합니다. 인지 심리학자들은 파블로프(Иван Петрович Павлов)의 개와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의 유전자, 핑커의 프로그래밍, 리들리의 발생 사이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본다라는 것은 머리 속에 있는 것을 투사하는 것이다." 유튜브에도 올라있는 유명한 동영상이 있습니다. 정확히 생각이 나지 않는데, 동영상을 시청하기 전 시청자는 여러 학생들이 공을 주고 받는 수를 세달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일~이분 정도의 시간동안 여러 학생들이 나와 공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비디오가 끝날 무렵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당신은 춤을 추며 지나가는 고릴라를 보셨습니까?" 놀랍게도 비디오를 다시 돌려보면 고릴라 복장을 한 어떤 사람이 브래이크댄스까지 추며 공을 주고받는 학생들 사이로 지나갑니다. 나는 그 고릴라를 보지 못했습니다. 공 세느라고 말이죠. 이것은 어느 대학에서 한 유명한 실험입니다. 본다라는 것은 단순히 자극을 해석하거나 프로그래밍 하는 작업은 아닌 것 같습니다. 푸코(Michel Foucault)는 '본다'라는 것은 "바라보면서 동시에 투사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나의 생각으로는 '본다'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Context처럼 생각됩니다. 이야기처럼 여러 문장들 가운데 의미있는 것들을 찾아 단락을 완성하는 작업같아 보입니다. 완성된 단락은 하나의 History가 되고 나에게 의미를 주는 듯 합니다. 이 컨텍스트 안에서 이질적인 문장이 들어있으면, 이질성이 크지 않을 때야 자의적 해석으로 교정할 수 있지만 이질성이 클 때는 이야기 구조 전체가 망가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단지 '본다'라고 하는 것을 구성하는 재료가 언어가 아니라 시각적 자극이고, 시각적 자극을 구성하는 텍스트가 오감에서 들어온 모든 자극이라는 것이고, 이야기처럼 직선적으로 읽어가는 구조가 아니라 시공의 4차원적 복합인것이지요. 이런 입장에서는 노에(Alva Noe)의 의견에 적극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노에는 인간의 마음은 오감으로 들어온 자극을 단순히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자극에 연장된 환경 전체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나 역시 의미있는 컨텍스트를 만들기 위한 환경 자극의 적극적 탐색, 탐색과 더불어 들어온 자극들의 해석, 해석하는데 있어서 이용할 Historical Memory of senses들이 모여 시각 영역에 활성화 된 감각을 주게 되면 그것이 본다라는 Context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시각 자극은 그 중 한 부분인 것입니다.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서, 사진을 찍는 다는 것은 나에게 삶의 Context를 시각을 통해 재구성하려는 작업입니다. 나는 사진을 잘 찍지 못합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싶을 뿐입니다. 디지털 카메라의 시대가 와서 이제는 Dektol냄새 맡을 일 없이 간단히 컴퓨터 앞에 앉아 이미지를 다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무엇을 보는가'가 '무엇을 찍는가'이다]란 명제를 변화시키지는 않는것 같습니다. 나도 디지털 카메라로 바꾸었습니다. 내가 내목에 올가미를 걸기 전에 나의 카메라가 나에게 무언가를 알려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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