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 추함, 언제나 고결한 삶
18세기 유럽의 낭만주의 이후 유럽은 시각예술의 전환을 맞이하게 됩니다. 낭만주의 이전의 시기까지는 많은 화가들이 아름다움이라는 관념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르네상스 이후 지상의 세계로 복귀한 인체의 아름다움, 귀족 초상화에서 보여지는 고결함, 기쁨... 아마도 "화가"라는 지위가 유럽의 귀족들과 교회에 귀속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귀족들은 자신이 지배하고 있는 구역에 아름다움을 부여하는 것을 꽤나 영광으로 여겼던 모양입니다. 예를 들면 르네상스 시절의 메디치家와 같은 귀족들은 예술에 많은 돈을 투자했습니다. 사실 르네상스는 메디치가와 같은 귀족들이 없었다면 그렇게 융성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낭만주의 시대가 오자 예술가들의 시선은 다른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름답고 고귀한 대상이 아닌 추한 대상이 화폭 안에 자리잡기 시작한 것입니다. 고야의 그림에는 귀족들도 있지만 고귀하게 표현되지 않았고, 피리부는 광대나 심지어 프랑스 군인들이 스페인의 양민들을 처형하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낭만주의 이후로 화가들이 귀족이나 궁정으로부터 많이 자유로워진 것이 큰 작용을 했겠지요. 왜 "추함"이라고 하는 것이 미의 영역으로 비집고 들어 온 것일까요? 미라는 것이 원래 추함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설마요.. 서양 전통의 Dualism은 미를 추함으로부터 오히려 분리 시켰고, 그 구분을 통해 미의 기준을 설립해 왔다고 보는 것이 좋겠죠. 오히려 아름다움만이 사람들에게 특별한 인상을 주는 것이 아니라 추함도 사람들에게 특별한 인상을 준다라는 표현이 더 적합한 것 같습니다.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시각 예술의 속성이 추함을 받아들이는 순간 예숙작품은 스스로의 모순에 빠져들었고, 예술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려야하는 상황에 빠져들었습니다. 덕분에 화가들은 "추함"이란 것을 탐구하기 위한 실험의 연속으로 모더니즘을 열긴 했습니다.
오늘은 부산의 "가야" 라는 달동네에 가게 되었습니다. 추함을 이야기 한 이유는 달동네가 가지고 있는 추한 인상이 너무나 강렬하기 때문입니다. 전혀 아름답지 않은 인상에 이렇게도 빠져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동정? 내가 가진 어두운 감정의 투사? 우울증? 분열증?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안좋은 처지를 보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가학적 본능?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추함 역시 사람을 사로잡는 그것만의 인상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세련된 작가가 아니라면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하기 힘든 그런 인상. 왕가의 자손인 신다르타 붓다를 신분조차 내박치고 질척한 삶의 한 가운데로 내달리게 만들었던 바로 그 인상...
가야 달동네 입구는 그래도 희망이 넘친다. 골목, 삶의 에너지가 끊임없이 빨려들어가는 골목은 나의 시선을 항상 멈추게 한다.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던 시절 우리 집에도 이런 가스통이 항상 있었다. 따듯한 음식을 주면서도 죽음의 위험을 내포한 모순덩어리의 인공물..
높은 지대로 올라갈 수록 건물들은 점점 낡고, 삶은 거친 시멘트 벽으로 더욱 더 많이 스며든다.
깨진 유리를 박아 넣은 블록, 가져갈 것 없는 달동네에 무엇을 위한 방어일까? 아마도 부서진 자존심을 보호하기 위함이 아닐까?
달동네 꼭대기에 자리잡은 가야사. 조그만 절이지만, 가난한 사람들 위에 올라섰지만, 갈 곳없는 희망을 그러 모아 소복히도 쌓아 놓았지만.. 부처는 화려하다. 누구를 위한 화려함일까? 누구에게 훔쳐온 화려함일까?
하지만 낭만주의 시대가 오자 예술가들의 시선은 다른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름답고 고귀한 대상이 아닌 추한 대상이 화폭 안에 자리잡기 시작한 것입니다. 고야의 그림에는 귀족들도 있지만 고귀하게 표현되지 않았고, 피리부는 광대나 심지어 프랑스 군인들이 스페인의 양민들을 처형하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낭만주의 이후로 화가들이 귀족이나 궁정으로부터 많이 자유로워진 것이 큰 작용을 했겠지요. 왜 "추함"이라고 하는 것이 미의 영역으로 비집고 들어 온 것일까요? 미라는 것이 원래 추함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설마요.. 서양 전통의 Dualism은 미를 추함으로부터 오히려 분리 시켰고, 그 구분을 통해 미의 기준을 설립해 왔다고 보는 것이 좋겠죠. 오히려 아름다움만이 사람들에게 특별한 인상을 주는 것이 아니라 추함도 사람들에게 특별한 인상을 준다라는 표현이 더 적합한 것 같습니다.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시각 예술의 속성이 추함을 받아들이는 순간 예숙작품은 스스로의 모순에 빠져들었고, 예술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려야하는 상황에 빠져들었습니다. 덕분에 화가들은 "추함"이란 것을 탐구하기 위한 실험의 연속으로 모더니즘을 열긴 했습니다.
오늘은 부산의 "가야" 라는 달동네에 가게 되었습니다. 추함을 이야기 한 이유는 달동네가 가지고 있는 추한 인상이 너무나 강렬하기 때문입니다. 전혀 아름답지 않은 인상에 이렇게도 빠져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동정? 내가 가진 어두운 감정의 투사? 우울증? 분열증?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안좋은 처지를 보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가학적 본능?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추함 역시 사람을 사로잡는 그것만의 인상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세련된 작가가 아니라면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하기 힘든 그런 인상. 왕가의 자손인 신다르타 붓다를 신분조차 내박치고 질척한 삶의 한 가운데로 내달리게 만들었던 바로 그 인상...
가야 달동네 입구는 그래도 희망이 넘친다. 골목, 삶의 에너지가 끊임없이 빨려들어가는 골목은 나의 시선을 항상 멈추게 한다.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던 시절 우리 집에도 이런 가스통이 항상 있었다. 따듯한 음식을 주면서도 죽음의 위험을 내포한 모순덩어리의 인공물..
높은 지대로 올라갈 수록 건물들은 점점 낡고, 삶은 거친 시멘트 벽으로 더욱 더 많이 스며든다.
깨진 유리를 박아 넣은 블록, 가져갈 것 없는 달동네에 무엇을 위한 방어일까? 아마도 부서진 자존심을 보호하기 위함이 아닐까?
달동네 꼭대기에 자리잡은 가야사. 조그만 절이지만, 가난한 사람들 위에 올라섰지만, 갈 곳없는 희망을 그러 모아 소복히도 쌓아 놓았지만.. 부처는 화려하다. 누구를 위한 화려함일까? 누구에게 훔쳐온 화려함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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