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009의 게시물 표시
살기위해 바라본다. 몇 달 전 내게 감당 할 수 없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일은 내 삶에 관한 이야기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시냅스가 군데군데 끊어진 뉴런이 만들어낸 감각들처럼 삶은 횡설수설하기만 합니다. 삶이 우울로 사그라들수록 세상을 바라보는 내 자신도 무의미와 혼돈으로 빠져들어갑니다. 몇 년간 잊고 지내던 카메라를 다시 꺼내 든 것은 금년 초 입니다.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사는 지, 무엇을 바라보고 사는지 알아야만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내게는 '사진을 찍는 다는 것'이 사람들이 생각하듯 추억을 남기기 위한 작업도 아니고, 피사체를 이미지 안에 고정시키는 작업도 아닙니다. 사진은 내게 '무엇을 보는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본다'라는 문제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본다'라는 것을 카메라가 상(像)을 만들어내는 작업에 많이 비유 합니다. 피사체로부터 반사된 빛이 수정체라는 랜즈를 통해 들어오면, 수정체는 피사체에 촛점을 맞추게 되고, 홍채는 조리개처럼 빛의 양을 조절합니다. 빛은 그렇게 조절되어 시각 피질 안에 자라잡게되고 시각 피질 안의 시세포 다발이 빛 자극을 뉴런을 통해 뇌로 전달하게 되는 작업을 '본다'라는 것의 개념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프로세스는 노벨상을 받은 허블과 비셀(David Hunter Hubel, Torsten Nils Wiesel)의 공동연구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문제는 수용된 자극을 뇌로 보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뇌는 과연 이렇게 전달되어 온 자극들을 어떠한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일까요? 시세포가 자극을 뉴런으로 전달하는 데 까지의 프로세스는 '본다'라는 작업의 반 정도이고 실제적으로 '본다라는 작업이 완성되려면 자극을 뇌가 해석하는 방식을 알아내야 합니다. 이 프로세스에 대해서는 허블과 비셀의 연구처럼 잘 알려져있지는 않습니다. 연구자들에 따라 논의가 분분한데 요즘 많이 유행하는 핑커(Steven Pinker...

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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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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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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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잊어버린 어느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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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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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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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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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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