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곰


강남구, 신사동과 반포동을 가르는 강남대로. 미친 네온사인이 취객을 유혹하는 보도블록 한 구석에 아이 한 명이 앉아있다. 바닥에 깐 깔개는 11월 초 차갑게 식은 벽돌의 냉기를 막아주기에는 너무 얇다. 아이는 엄마에게 무엇인가를 받아 먹고 있다. 눈이 아프도록 유치한 채도 높은 네온 불빛은 아이가 먹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도록 온갖 색깔로 그것을 물들인다. 잘 알아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강남의 아이들이 먹는 유기농 과자는 아니다. 볼록한 이마 아래로 보이는 그것이 아이의 식욕을 달구었는지, 아이가 들고 있는 그 과자는 침으로, 반사된 네온 빛으로 번들거린다.

아이의 엄마는 옆에서 싸구려 펠트 천 위에 열쇠고리를 펼쳐놓았다. 깔아 놓은 천을 돌돌 말아 끈으로 묶으면 한 손으로 들 수 있을 딱 그만큼의 물건들이 나름의 질서를 가지고 놓여있다. 한 덩어리의 싸구려 물건들, 물건들은 그것들이 가진 속성 별로, 외적 형태의 단순한 차이로 구분한 분류 별로 구분 되고 줄 지어져 아무리 잘 정리되어 있어도, 그녀가 깔아놓은 것들은 누가 보아도 싸구려다. 그래, 정말 미안하지만, 누가 보아도 싸구려다. 그녀가 진정한 보따리장사였다면 물건을 그런 안목을 가지고 떼어오지는 않았을 것 같다. ‘진정한 보따리장사’? 보따리장사 비웃으시나? 그들은 일명 '나까마'라 불린다. 보따리에 들고 다니기에는 너무 커버린 대형 유통업자들도 있다. 덩치 꽤나 있는 나까마들은 세계를 누빈다. 법인 사업자만 아닐 뿐이지 그들은 정말 무역업자들이다.

그녀는 열쇠고리를 팔러 나온 것이 아니다. "생존"이란 단어가 그녀를 아이와 함께 신사동 유흥가로 내 몰았을 뿐이다. 그녀는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눈길을 던지지 못한다. 그녀는 "장사"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다. 물건을 판다는 것, 어쩌면 심리학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물건을 사는 줄 알지만, 사실 물건 위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의미들을 산다. 권력, 섹스, Class.... 현대의 상품이란 그런 기호들이 사용가치 위에 잘 도색 된 생산물들이다. 지나치는 사람들은 상품 위에 그런 의미들이 달라 붙어있는지 잘 모른다. 그러나 진정한 장사꾼은 그들이 상품보다는 상품 위에 달라붙은 의미들을 소비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안다. 진정한 장사꾼은 사람들을 볼 줄 안다. 그것도 물건을 살 사람들의 눈과 그들 조차도 알지 못하는 마음을 볼 줄 안다. 사람들의 마음에 의미를 심어주기 위해 자신이 어떤 표정으로 누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너무도 잘 안다. 스카프를 파는 장사꾼을 보자. 만약 그가 진정한 장사꾼이라면, 그는 사람의 얼굴만 보지 않는다. 그는 손님의 욕망을 본다. 그는 스카프를 사러 온 여인의 바디라인에 가장 잘 어울리는 상품을 어느새 골라 진정 기쁜 얼굴로 어깨 치에 갖다 대고 있을 것이다. 그 손님이 스카프가 필요했다면 자신도 모르는 새 장사꾼이 말한 “스카프 하나가 사람을 얼마나 고매하게 만드는지 모를 겁니다.” 라는 말의 의미를 사기 위해 지갑에서 천 원짜리 지폐를 몇 장 꺼내어 세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 꽤나 불량해 보이는 주전부리를 아이에게 주고 있는 그녀는 지나가는 행인을 행인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얼마예요?" 나는 싸구려 가운데 가장 심플한 물건 하나를 골라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5000원이요." 대답하는 아주머니는 정말 작았다. 쪼그려 앉은 아주머니를 서서 내려다 볼 때 아주머니가 그렇게 작은지 몰랐다. 아주머니는 히잡(Hijab)이라도 두른 듯 머리카락에서 목까지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고 앞머리에서 밑으로 깊이 내린 스카프는 얼굴을 충분히 가리고 있었다. 나 역시 쪼그려 앉아 물건을 골랐기에 애써 가린 아주머니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이의 얼굴 역시 볼 수 있었다. 소처럼 검고 긴 속눈썹, 짖고 날카로운 눈썹, 얼굴의 반은 차지할듯한 커다란 눈, 그 안에 세상은 모든 네온을 빨아들이는 검고 맑은 눈동자가 가득 차 있다. 아이는 이제 두, 세단어로 문장을 만들기 시작한 28개월에서 30개월 정도 된 벵골계열 혼혈 여자아이였다. 난 가격이 상품의 질에 비해 너무 비싸다는 생각을 했지만 깎을 생각은 없었다. 내가 산 상품은 우울하게 생긴 검은색 곰 열쇠고리가 아니라 그 아이를 보며 느낀 동정심에 대한 위로였고, 어쩌면 그 모녀보다 좋은 상황 속에서 그들에게 동정심을 가진 내 자신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세상 누구도 다른 사람들에게 동정 받고 싶어하지 않는다. 단지 동정 받을만한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있을 것이다. 그 아주머니가 히잡처럼 두른 스카프는 분명 사람들이 던지는 동정의 눈빛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자존심이었을 게다.


댓글